DAC 안에 숨어 있는 조율 도구: 필터는 왜 존재하는가
중급 이상의 DAC를 사용하다 보면 전면 패널이나 전용 앱에서 필터(Filter) 설정 메뉴를 마주치게 된다. Fast, Slow, Sharp, Minimum Phase, Linear Phase 같은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용자가 기본값으로 두거나 이름이 가장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이 필터 설정은 DAC가 소리를 만들어내는 마지막 단계에서 음색과 질감에 직접 개입하는 파라미터다. 어떤 필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DAC, 같은 헤드폰에서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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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브를 돌리는 것만으로 소리의 질감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용자는 그 존재조차 모른다. |
디지털 필터가 필요한 이유: 오버샘플링 이후의 처리 문제
DAC에서 디지털 필터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버샘플링과 이미지 억제(Image Rejection) 때문이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샘플링 주파수의 배수 주변에 원래 신호와 대칭적으로 생기는 이미지 성분(Alias)이 발생한다. 44.1kHz 신호라면 44.1kHz, 88.2kHz, 132.3kHz… 주변에 원신호의 복사본이 겹쳐 나타난다. 이 이미지 성분은 가청 대역 바깥에 있지만, 아날로그 증폭 단계에서 상호 변조 왜곡(IMD)을 일으킬 수 있어 제거해야 한다.
이를 처리하는 것이 디지털 로우패스 필터(Low-Pass Filter)다. 필터는 가청 대역 상한(20kHz) 위로 올라가는 주파수 성분을 잘라내어 이미지 성분이 아날로그 출력 단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어떤 방식으로 자르느냐에 따라 가청 대역 내 신호의 특성도 함께 변한다. 완벽하게 날카롭게 자르면 시간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고, 부드럽게 자르면 주파수 응답 경계가 흐려진다. 이 트레이드오프의 균형을 어디에 두느냐가 필터 설계의 핵심이고, 제조사마다 다른 철학을 가진 이유다.
롤-오프(Roll-off): 얼마나 날카롭게 자를 것인가
롤-오프는 필터가 주파수를 감쇠시키기 시작하는 기울기를 가리킨다. 스팁 롤-오프(Steep/Fast Roll-off) 필터는 차단 주파수 이상에서 급격하게 신호를 감쇠한다. 주파수 응답 그래프에서 마치 절벽처럼 떨어지는 모양이 나타난다. 이 설계에서는 20kHz까지의 가청 대역이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평탄하게 유지되고, 이미지 억제 성능도 높다. 스펙 측면에서 이상적으로 보이는 방식이다.
반면 슬로우 롤-오프(Slow/Gentle Roll-off) 필터는 차단이 완만하게 이루어진다. 주파수 응답 곡선이 고역에서 서서히 내려가는 형태다. 이 경우 이미지 억제 성능은 낮아지지만, 시간 영역에서의 특성이 개선된다. 가청 대역 최상단 근처의 주파수 응답이 약간 내려가는 것을 감수하는 대신, 소리의 자연스러운 감쇠와 시간 응답을 얻는 선택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소리로 들리는지는 청취자의 감각과 선호에 따라 달라지며, 이것이 DAC 제조사들이 복수의 필터 옵션을 제공하는 이유다.
롤-오프 기울기를 결정하는 탭 수(Filter Tap)의 역할
디지털 필터의 성능은 탭 수(Tap Count)로 표현된다. 탭은 필터 연산에 사용되는 계수의 수로, 탭 수가 많을수록 더 정교한 필터링이 가능하지만 연산량과 지연 시간이 늘어난다. 스팁 롤-오프 필터는 날카로운 차단 특성을 만들기 위해 많은 탭이 필요하고, 이 탭들이 시간 축에서 길게 늘어서면서 임펄스 응답에 긴 꼬리(링잉, Ringing)를 만들어낸다. 슬로우 롤-오프 필터는 상대적으로 적은 탭으로 구현 가능해 시간 응답이 더 깔끔하다. 탭 수와 음질 특성 사이의 이 관계가 필터 선택에서 핵심적인 고려 사항이다.
임펄스 응답: 시간 영역에서 필터를 읽는 방법
임펄스 응답(Impulse Response)은 필터의 시간 축 특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측정 방식이다. 순간적인 단일 펄스 신호(임펄스)를 입력했을 때 필터 출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으로, 이 파형의 모양에서 필터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상적인 임펄스 응답은 입력 순간에 정확히 단 한 번의 피크가 나타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형태다. 현실의 디지털 필터는 이 이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며, 그 벗어남의 방식이 소리의 인상에 영향을 준다.
선형 위상 필터(Linear Phase Filter)는 임펄스 응답에서 피크 이전과 이후에 대칭적인 링잉이 나타난다. 피크 앞에 나타나는 링잉을 프리-링잉(Pre-ringing), 뒤에 나타나는 것을 포스트-링잉(Post-ringing)이라 한다. 프리-링잉은 실제 음원에 존재하지 않는 성분이 소리보다 먼저 들리는 것을 의미하며, 타격음이나 피치카토처럼 날카로운 시작을 가진 소리의 자연스러운 어택감을 흐릴 수 있다. 선형 위상 필터는 모든 주파수 성분의 위상 지연이 일정해 그룹 딜레이(Group Delay)가 평탄하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이 프리-링잉이 단점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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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 속 숫자 뒤에는 수십 가지 신호 처리 판단이 숨어 있다. |
최소 위상 필터(Minimum Phase Filter): 프리-링잉을 없애는 선택
최소 위상 필터는 프리-링잉을 제거하는 대신 포스트-링잉만 남기는 방식이다. 임펄스 응답에서 피크 이전은 깨끗하고 이후에만 감쇠하는 꼬리가 붙는 형태다. 음악적으로 포스트-링잉은 자연계의 잔향과 유사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프리-링잉보다 덜 부자연스럽게 인식된다. 타격음의 어택이 선명하게 살아있고, 음의 시작이 또렷하게 들린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모든 주파수 성분의 위상 지연이 일정하지 않아(비선형 위상) 주파수에 따른 위상 분산이 발생한다.
위상 분산이 실제로 청감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선형 위상 필터와 최소 위상 필터의 음질 차이를 이중 맹검 테스트에서 구분하지 못했다는 결과도 있지만, 경험 있는 청취자들이 차이를 감지한다는 보고도 꾸준히 나온다. 이 논쟁의 결론은 아직 열려 있으며, 직접 비교 청취가 가장 현실적인 판단 방법이다.
혼합 위상 필터와 무지향성 필터의 등장
선형 위상과 최소 위상의 장단점을 절충하려는 시도에서 혼합 위상(Mixed Phase) 필터가 등장했다. 이 필터는 롤-오프 특성과 링잉 억제를 조합하여 프리-링잉은 최소화하면서 위상 응답도 어느 정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ESS나 AKM 칩에서 제공하는 일부 필터 프리셋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또한 무지향성(Apodizing) 필터는 레코딩 과정에서 이미 음원에 포함되어 있는 링잉 성분까지 제거하도록 설계된 특수 필터로, 원본 음원 자체의 왜곡을 보정하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NOS(Non-OverSampling) 모드: 필터를 아예 없애는 선택
일부 DAC는 오버샘플링과 디지털 필터를 완전히 비활성화하는 NOS(Non-OverSampling) 모드를 제공한다. 원본 샘플 데이터를 어떤 연산 처리도 없이 직접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필터 링잉이 전혀 없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이미지 억제가 없어 이론상 이미지 성분이 아날로그 출력에 그대로 나타나는 단점이 있지만, 출력 단의 아날로그 로우패스 필터가 이를 걸러주는 구조라면 실질적인 문제가 줄어든다.
NOS 모드를 지지하는 청취자들은 이 방식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아날로그에 가까운 소리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측정치는 오버샘플링 모드보다 낮을 수 있지만 청감 선호도에서 우위를 보인다는 것이다. R-2R DAC나 멀티비트 DAC를 선호하는 오디오 팬들이 NOS 모드에 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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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헤드폰, 같은 DAC. 필터 하나가 완전히 다른 소리를 만든다. |
취향별 필터 선택 가이드: 어떤 소리를 원하는가
지금까지 설명한 필터 특성을 청취 스타일과 음악 장르에 맞게 정리하면 실용적인 선택 기준이 나온다. 클래식, 재즈, 어쿠스틱 음악처럼 음의 어택과 다이내믹이 중요한 장르를 주로 듣는다면 최소 위상 계열 필터가 유리하다. 프리-링잉이 없어 피아노 건반 타격음이나 현악기 보잉의 시작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음상의 위치감이 선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팝, 록, 전자 음악처럼 주파수 응답의 평탄함과 고역의 선명함이 중요한 장르라면 선형 위상 계열 스팁 롤-오프 필터가 적합할 수 있다. 모든 주파수가 동일한 위상으로 재현되어 음장의 좌우 균형이 정밀하고, 고역의 해상력이 높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장시간 청취나 피로도를 중시한다면 슬로우 롤-오프 계열을 시도해볼 만하다. 고역의 감쇠가 완만해 전체적인 소리가 부드럽고 자극이 적다. 헤드폰 청취보다 스피커 환경에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DAC별 필터 메뉴 명칭 대조표
제조사마다 필터 이름이 달라 혼란스러울 수 있다. 대표적인 명칭 패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SS 기반 DAC에서 'Fast Roll-off Linear Phase'는 스팁 롤-오프 선형 위상, 'Slow Roll-off Linear Phase'는 슬로우 롤-오프 선형 위상, 'Fast Roll-off Minimum Phase'는 스팁 롤-오프 최소 위상에 해당한다. AKM 기반 제품에서는 'Sharp'가 스팁, 'Slow'가 슬로우 롤-오프에 대응하며 'Short Delay'가 최소 위상 계열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Chord 제품처럼 독자적인 FPGA 필터를 사용하는 브랜드는 WTA(Watts Transient Aligned) 같은 고유 명칭을 쓰기도 한다.
필터를 바꿀 때 실제로 들리는 차이
필터 변경 효과를 귀로 확인하려면 조건을 단순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일한 음원, 동일한 볼륨, 동일한 헤드폰이나 스피커로 필터만 바꿔가며 비교한다. 효과가 잘 드러나는 음원은 피아노 독주, 타악기가 포함된 재즈 트리오, 또는 선명한 현악 앙상블이다. 타격음의 어택감, 고역의 부드러움 혹은 날카로움, 스테레오 음장의 선명도를 집중해서 비교한다. 차이가 미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정상이다. 필터의 영향은 극적이지 않지만 누적되어 청감 만족도에 영향을 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답 필터'는 없다는 것이다. 같은 DAC를 사용하더라도 헤드폰 특성, 앰프 성향, 청취 장르, 개인의 청각 민감도에 따라 최적의 필터가 달라진다. 제조사가 복수의 필터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선택권을 사용자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다. DAC 메뉴 깊숙이 숨어 있는 그 설정 페이지, 지금 한 번 열어볼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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