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도 온도가 있다: DAC 칩이 음색을 결정하는 방식
오디오 커뮤니티에서 ESS Sabre와 AKM은 오랫동안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진영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한쪽은 차갑고 해석적이며, 다른 쪽은 따뜻하고 유기적이라는 평가가 굳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이 '온도'라는 감성적 언어 뒤에는 실제로 측정 가능한 기술적 차이가 존재한다. 두 회사가 선택한 아키텍처와 노이즈 처리 방식, 그리고 설계 철학의 차이가 최종적으로 귀에 닿는 소리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감각의 언어를 기술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DAC 칩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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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칩. 그러나 소리의 온도는 완전히 다르다. |
델타-시그마 변환: 두 칩이 공유하는 출발점
ESS Sabre와 AKM은 모두 델타-시그마(Delta-Sigma, ΔΣ) 방식의 DAC 아키텍처를 채택하고 있다. 델타-시그마 변환이란 낮은 해상도의 샘플을 매우 높은 주파수로 오버샘플링한 뒤, 노이즈를 가청 주파수 대역 밖으로 밀어내는 노이즈 쉐이핑(Noise Shaping) 기술을 핵심으로 한다. 이 방식은 R-2R 래더 DAC처럼 저항 소자의 정밀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대량 생산 환경에서 안정적인 성능을 확보하기 유리하다.
오버샘플링 비율은 제품에 따라 다르지만, 현대 고급 DAC 칩은 원본 샘플레이트의 수백 배에서 수천 배에 달하는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양자화 노이즈는 20kHz 이상의 초음파 영역으로 밀려나고, 뒤에 오는 로우패스 필터가 이를 걷어낸다. 두 회사 모두 이 기본 원리를 공유하지만, 구체적인 구현 방식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고 그것이 음색의 분기점이 된다.
ESS Sabre의 하이퍼스트림: 측정치를 향한 집착
ESS Technology의 Sabre 시리즈, 특히 ES9038PRO나 ES9028PRO 같은 플래그십 칩은 하이퍼스트림(HyperStream)이라는 독자적인 델타-시그마 변조 기술을 사용한다. 하이퍼스트림의 핵심은 복수의 DAC 모듈러를 병렬로 배치해 노이즈를 분산시키는 방식이다. ES9038PRO를 예로 들면, 8채널 각각에 8개의 DAC 모듈러를 운용해 총 64개의 변환기가 동시에 동작한다. 이 병렬 구조는 개별 변환기의 오차를 통계적으로 평균화하여 SNR과 THD+N 수치를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그 결과는 측정치로 직접 나타난다. ES9038PRO는 최대 140dB SNR(A-weighted)과 –122dB THD+N을 공식 스펙으로 제시한다. 실측 환경에서는 이보다 낮게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독립적인 측정 플랫폼에서 115~125dB SINAD를 기록하는 ESS 기반 DAC 제품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 수치들은 측정 가능한 왜곡과 노이즈가 사실상 인간의 청각 한계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SS 특유의 소리가 '차갑다'는 평가의 기술적 배경
ESS Sabre가 '디지털스럽다' 또는 '차갑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측정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관련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고조파 왜곡의 구성 비율이다. 왜곡이 극도로 낮더라도, 남아 있는 왜곡 성분이 어떤 차수(Harmonic Order)인지에 따라 소리의 인상이 달라진다. ESS 칩의 경우 홀수 차 고조파(3차, 5차)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이 일부 측정 데이터에서 관찰된다. 홀수 차 고조파는 짝수 차 고조파(2차, 4차)에 비해 인간의 귀에 더 날카롭고 불협화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ESS 칩은 기본적으로 공격적인 노이즈 쉐이핑 설계를 채택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청 대역 최상단 부근의 신호 처리 특성이 타 칩 대비 다소 강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상력이 높다'는 표현과 '고역이 쏜다'는 표현이 동시에 등장하는 배경에는 이런 설계상의 특성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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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빛 아래 놓인 DAC. 공간의 온도가 소리의 온도와 닮아 있다. |
AKM 벨벳 사운드: 자연스러움을 향한 설계 철학
아사히 카세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Asahi Kasei Microelectronics), 즉 AKM의 벨벳 사운드(Velvet Sound) 아키텍처는 ESS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AKM은 측정치의 극한보다 인간의 청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소리 특성을 우선했다. 이 철학은 제품 라인업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된다.
AKM의 플래그십 칩인 AK4499EX나 AK4191EQ+AK4499EX 조합은 전류 출력(Current Output) 방식을 채택한다. 일반적인 전압 출력 방식 DAC와 달리, 전류 출력 방식은 후단의 I-V 변환 회로 설계에 따라 음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AKM은 이 구조를 통해 설계자가 목표하는 음색 방향으로 세밀하게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벨벳 사운드가 '따뜻하다'는 평가의 측정적 근거
AKM 기반 DAC의 THD+N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왜곡 수치가 ESS 대비 다소 높더라도 2차 고조파 성분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경향이 관찰된다. 2차 고조파는 원음의 한 옥타브 위 배음에 해당하며, 이는 진공관 앰프나 아날로그 테이프 레코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왜곡 유형과 유사하다. 인간의 귀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 유형의 왜곡을 '따뜻함'이나 '풍부함'으로 인식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AKM의 소리가 아날로그적 질감을 갖는다는 표현은 이 맥락에서 기술적 의미를 가진다.
실측 성능 면에서 AKM의 최신 플래그십 칩들은 ESS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AK4499EX의 공식 스펙은 SNR 140dB, THD+N –124dB로, 수치상으로는 ESS와 동등한 영역에 진입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칩을 탑재한 실제 제품들 사이에서 음색 차이가 감지되는 이유는, 스펙 수치 이면에 있는 왜곡의 '성격'과 필터 설계, 전류·전압 출력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필터 설계가 음색에 미치는 또 다른 변수
DAC 칩의 소리를 논할 때 디지털 필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오버샘플링 이후 가청 대역 외 노이즈를 제거하는 로우패스 필터는 크게 레어(Slow Roll-off)와 스팁(Sharp/Fast Roll-off) 방식으로 나뉘며, 각각 임펄스 응답 특성이 다르다. 스팁 필터는 주파수 응답 경계가 명확하지만 프리-링잉(Pre-ringing)이라는 시간 영역의 아티팩트를 발생시킨다. 레어 필터는 프리-링잉은 적지만 고역 롤오프가 완만해 초고역 특성에 영향을 준다.
ESS와 AKM 모두 여러 종류의 디지털 필터 옵션을 칩 내부에 탑재해 제품 설계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SS는 기본적으로 공격적인 선형 위상 필터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고, AKM은 최소 위상 계열 필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최소 위상 필터는 포스트-링잉은 있지만 프리-링잉이 없어, 음악적으로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평가가 많다. 이 필터의 성격 차이도 두 칩 사이의 소리 인상 차이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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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리를 원하는가. 그 질문이 DAC 칩셋 선택의 출발점이다. |
2021년 AKM 공장 화재 이후의 시장 변화
2021년 10월, AKM의 주력 반도체 생산 공장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사건은 오디오 시장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AKM 칩 기반 제품들의 생산이 중단되거나 연기되었고, 많은 제조사들이 ESS 기반 칩으로 전환하거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씨러스 로직(Cirrus Logic) 등 대안 칩셋을 채택했다. AKM 칩을 탑재한 기존 제품들의 중고 가격이 한동안 급등하기도 했다.
AKM은 이후 생산 시설을 재건하고 AK4499EX를 포함한 새로운 플래그십 라인업을 출시하며 시장에 복귀했다. 이 경험은 DAC 칩 시장이 소수의 제조사에 집중되어 있다는 취약성을 드러냈고, 동시에 AKM 기반 소리에 대한 오디오 팬들의 선호가 얼마나 뚜렷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ESS와 AKM, 어떤 소리가 나에게 맞는가
두 칩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SS Sabre는 측정 성능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높은 해상력과 분석적인 사운드 스테이지를 원하는 리스너에게 유리하다.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음의 분리와 공간감이 중요한 장르, 그리고 헤드폰 환경에서 세밀한 디테일을 추구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AKM 벨벳 사운드는 자연스러운 배음 구조와 유기적인 음색으로 장시간 청취 피로도를 낮추며, 보컬 음악이나 재즈, 어쿠스틱 장르에서 따뜻하고 입체적인 음장감을 제공한다.
다만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같은 ESS 칩을 탑재하더라도 아날로그 출력단 설계, 전원부, 오피앰프(Op-Amp) 선택에 따라 음색은 크게 달라진다. AKM 기반 제품이 ESS보다 따뜻하다는 도식도 실제 제품 단위에서는 예외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칩셋은 소리의 출발점을 결정하지만, 회로 설계 전체가 소리를 완성한다. 결국 DAC 선택에서 측정 수치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수치를 확인한 뒤에는 반드시 본인의 귀로 직접 들어보는 과정이 남아 있다. 당신이 원하는 소리의 온도는 몇 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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