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던 나의 취향이 일상의 취미로 새겨지는 시간의 기록
작품 소개
『제3인류』는 2013년 10월 국내 출간 이후 연속 3개월간 종합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전6권으로 구성된 이 장편 SF소설은 베르베르가 신화와 철학, 대담한 과학 이론을 접목해 야심차게 집필한 신창세기이자, 그의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독자들에게 독특한 시간 설정을 제시합니다. 소설을 펴서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언제 읽더라도 우리는 10년 후의 지구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정은 작품에 현실감을 더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인류의 미래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듭니다.
줄거리의 전개
거인의 발견과 비밀 프로젝트
이야기는 남극에서 시작됩니다. 저명한 고생물학자 샤를 웰즈의 탐사대가 1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거인의 유골을 발굴합니다. 인류사를 다시 쓰게 만들 이 중대한 발견은 사고와 함께 파묻히고 말지만, 이는 곧 더 큰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샤를 웰즈의 아들이자 베르베르의 전작 『개미』의 주인공 에드몽 웰즈의 증손자인 다비드 웰즈는 미래 인류의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입니다. 그는 증조부 에드몽의 영향을 받아 인류의 진화가 소형화의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지론을 펼칩니다. 한편 내분비학자 오로르 카메러는 여성화가 인류의 미래라고 믿습니다.
이 두 과학자는 나탈리아 오비츠 대령이 이끄는 비밀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됩니다. 핵 위협, 환경 재앙, 자원 고갈, 대전염병, 야만적 자본주의, 종교적 광신 등으로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인류 파멸의 위기를 막기 위해, 그들은 생명공학의 힘으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에마슈의 탄생
프로젝트팀은 연구 끝에 키 17센티미터의 초소형 인간 '에마슈(Emachs)'를 창조해냅니다. 에마슈들은 현생 인류보다 작고, 성비가 9대 1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방사능과 오염된 환경에 대한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류의 진화된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황폐한 미래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대재앙의 시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인류는 연속된 대재앙에 직면합니다. 먼저 이집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약 20억 명이 사망합니다. 이어서 소행성 충돌로 30억 명이 희생되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또다시 40억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10억 명씩 사망자 수가 증가하는 패턴은 베르베르 특유의 계산된 서사 구조를 보여줍니다.
에마슈들은 처음에는 이란의 호전주의자들의 무차별 핵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는 군사 첩보원으로 활동합니다. 작은 몸집과 기민한 판단력을 활용해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막아내는 성과를 올리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사회에 극적으로 노출되면서 큰 파문이 일어납니다.
인간과 에마슈의 공존과 갈등
에마슈들은 인간이 진입할 수 없는 사고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펼치며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됩니다. 깊은 광산에 갇힌 광부를 구조하고, 각종 재난 현장에서 활약하면서 '피그미 프로덕션'이라는 에마슈 파견 용역 회사까지 설립됩니다. 에마슈들은 의료, 기술, 일반 가정생활 영역에까지 임대 파견되며 인간 사회에 순조롭게 합류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소년이 에마슈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처벌 여부를 놓고 법적, 윤리적 공방이 벌어집니다. 에마슈의 정체성이 쟁점으로 떠오르며, 인간의 법은 결국 에마슈들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판결합니다. 이는 에마슈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창조자인 인간과 피조물인 에마슈 사이의 관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에마슈 사회의 진화
흥미롭게도 베르베르는 에마슈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을 인류 문명의 시뮬레이션처럼 묘사합니다. 에마슈들의 사회에도 타락과 범죄가 발생하고, 종교가 생겨나며, 제도가 만들어집니다. 에마 666이라는 인물은 에마슈 사회의 종교 교주가 되어 반거인주의를 주장하며 후에 4대 여왕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인간 사회가 걸어온 길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독자들에게 야릇한 웃음과 함께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킵니다.
한국적 요소의 등장
5-6권에서는 한국인 여성 고고학자 히파티아 김(김은선)이 등장합니다. 베르베르는 단군 신화, 남북 분단 등 한국적 요소를 작품에 깊이 있게 담아냈으며, 로봇공학 연구자 프리드만은 연구 장소로 서울을 선택하고 한국의 기술력을 극찬합니다. 주인공이 타는 자동차가 현대차로 설정되는 등 한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작품의 주제와 철학적 메시지
가이아 - 살아있는 지구
『제3인류』의 가장 독특한 요소 중 하나는 지구를 의식 있는 존재 '가이아'로 인격화했다는 점입니다. 가이아는 독백의 형태로만 등장하며,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전체 소설에서 가이아의 독백만 1인칭 서술로 독립되어 흐릅니다.
가이아는 지진, 화산 폭발, 환경 변화 등을 통해 지표 활동을 일부 통제할 수 있으며, 인류의 행동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극에서 거인의 유골이 발굴될 때 가이아는 "남극쪽에서 뭔가가 따끔거린다"고 표현합니다. 가이아는 주인공 다비드와 소통하면서, 인류가 지구를 소모하는 방식을 계속한다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작법을 통해 베르베르는 암울한 묵시록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희망을 담은 우화의 색채로 변화시킵니다. 인류가 지금처럼 지구 행성을 소모하는 자기 파괴적 생활방식을 계속한다면 종말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와 함께, 인류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창조주의 딜레마
베르베르는 이 작품에서 여전히 미성숙한 존재인 인간을 창조주, 즉 불완전한 신의 위치에 놓습니다. 인간이 에마슈를 창조하면서 겪는 방황과 갈등은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의 고민을 투영하는 것 같습니다. 에마슈들이 독립을 꿈꾸고, 자신들만의 사회를 만들고, 때로는 창조주인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과정은 성경의 창세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칠각형 체스판과 인류의 선택
작품에서는 칠각형 체스판이 등장하여 인류가 나아갈 일곱 가지 미래의 길을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베르베르가 복잡한 철학적 질문을 시각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각 방향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진화의 경로를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인류 스스로 진화의 방향을 선택하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베르베르 문학의 집대성
『제3인류』는 베르베르의 전작들이 시도한 기획들을 집대성한 작품입니다. 『개미』에서 보여준 작은 생물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타나토노트』와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다룬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탐구가 모두 이 작품에 녹아있습니다.
특히 주인공 다비드 웰즈가 『개미』의 에드몽 웰즈의 증손자로 설정된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에드몽이 개미 연구를 통해 인류의 진화가 소형화를 향할 것이라 주장했고, 이것이 증손자 다비드의 생각과 연구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정은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인적 감상과 평가
스케일과 야심
『제3인류』는 베르베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스케일이 크고 야심찬 시도입니다. 전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 속에 인류의 과거(17미터 거인), 현재(현생 인류), 미래(17센티미터 에마슈)를 모두 아우르는 구성은 그야말로 장대합니다. 핵전쟁, 전염병, 환경재앙 등 현실적인 위기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초소형 인류라는 기상천외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발상이 놀랍습니다.
현실성과 상상력의 균형
베르베르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앙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집트 독감의 확산, 이란의 핵 위협,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은 현재 국제 정세를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이러한 현실성 위에 에마슈라는 상상의 존재를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에마슈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의 묘사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보였던 에마슈들도 점차 인간과 같은 욕망, 갈등, 권력 다툼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교가 생겨나고, 계급이 나뉘고, 범죄가 발생하는 과정은 마치 인류 문명사를 빠르게 재생하는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유머와 성찰의 조화
베르베르의 또 다른 강점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에마슈들이 인간 사회에서 "어깨 주물러주기", "등 긁어주기", "때 밀어주기" 같은 서비스 업무를 맡는 장면이나, 인간들이 축구 방송을 보며 과도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에마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 등은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이면서 동시에 재치 있는 유머입니다.
이러한 유머는 독자들이 작품에 담긴 무거운 메시지를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줍니다. 환경 파괴, 핵 위협, 인간의 탐욕 같은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암울해질 수 있는데, 베르베르는 유머라는 완충제를 통해 이를 방지합니다.
아쉬운 점들
물론 작품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 독자들은 전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다소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1권과 후반부 권에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 양상이 달라져 위화감을 느낀다는 평도 있습니다. 실제로 1-4권 출간 후 5-6권이 나오기까지 약 2년이 걸렸고, 그 사이 번역가도 일부 바뀌면서(이세욱 → 전미연) 문체나 뉘앙스에 미묘한 차이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베르베르의 다른 작품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제3인류』가 전작들과 비슷한 얼개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작은 존재의 시각, 환경 문제 등은 베르베르가 계속해서 다루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현시점에서의 의미
2013년 출간 당시에도 시의적절했던 이 작품의 메시지는 2025년인 지금,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기후변화는 가속화되고 있고, 팬데믹의 위협은 코로나19를 통해 현실이 되었으며, 국제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에마슈처럼 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인류가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베르베르의 경고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론 -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제3인류』는 단순한 SF소설을 넘어 인류 문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우화입니다. 베르베르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류는 과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창조한 것들이 우리를 대체할 수도 있는가? 진정한 진화란 무엇인가?
가이아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지구의 탄식, 에마슈들이 겪는 성장통, 인간 사회가 직면한 위기들은 모두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됩니다. 인류는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적 소형화든, 의식의 확장이든, 환경에 대한 태도 변화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전6권이라는 여정은 쉽지 않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베르베르가 왜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3인류』는 베르베르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인류의 어리석음과 위대함을, 파괴성과 창조성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에마슈 같은 극적인 변화 없이도,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질 수 있을까?
베르베르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던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 독자들, 아니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몫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3인류』가 단순한 SF소설을 넘어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도 GentlemanVibe에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취향이 발견되고, 그것이 일상의 단단한 리듬이 되는 과정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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