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C 칩셋, 알아야 할까요 — 아니면 느껴야 할까요
DAC 제품을 처음 찾아보기 시작하면 반드시 마주치는 두 이름이 있습니다. ESS와 AKM. 제품 스펙 페이지에 작게 적혀 있는 이 단어들은 단순한 부품 정보가 아닙니다. 같은 음원을 재생해도 이 두 칩셋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성격은 분명히 다르고, 그 차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시스템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회로 설계 지식이 없어도 됩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와 사양이 아니라 소리의 감각적인 차이, 그리고 그 차이가 내 취향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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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칩 하나가 소리의 성격 전체를 결정한다. ESS냐 AKM이냐, 그 선택은 생각보다 감각적인 문제다. |
ESS Sabre: 소리를 해부하는 정밀함
ESS Technology의 Sabre 칩셋 — ES9038PRO, ES9039Q2M 등 — 은 오디오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해상도의 대명사'로 불려왔습니다. 측정 수치가 증명하듯, THD+N(전체 고조파 왜곡 + 잡음)이 극히 낮고 SNR(신호 대 잡음비)이 높아 음원 안에 담긴 정보를 가능한 한 손실 없이 꺼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이 특성이 소리로 나타날 때는 흔히 "차갑다", "선명하다", "유리처럼 투명하다"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와인으로 비유하자면 산도가 분명한 화이트 와인에 가깝습니다. 혀 위에서 각각의 풍미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느껴지고, 여운보다는 그 순간의 선명도가 강점입니다. 오케스트라 녹음에서는 각 악기의 위치와 음색이 정밀하게 분리되어 들리고, 전자음악에서는 비트 하나하나의 질감이 날카롭게 살아납니다. 모니터링 성향이 강한 소리, 즉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캐릭터입니다.
다만 이 정밀함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습니다. 음원의 결함이나 녹음 품질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저품질 파일이나 마스터링이 거친 음원에서는 다소 피곤한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ESS 기반 DAC가 좋은 성능을 발휘하려면 소스 품질이 함께 받쳐줘야 합니다.
AKM Velvet Sound: 소리를 감싸는 온기
AKM, 즉 Asahi Kasei Microelectronics의 칩셋은 회사 스스로 자신들의 음향 철학에 'Velvet Sound'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명칭 하나가 AKM 사운드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촉각적으로 풍성하며, 가장자리가 날카롭지 않습니다.
같은 와인 비유를 이어가자면 AKM은 바디감이 풍부한 레드 와인에 가깝습니다. 개별 음들의 경계선이 ESS만큼 선명하지 않은 대신,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납니다. 보컬의 배음이 풍성하고, 현악기에서는 활이 줄 위를 미끄러지는 질감이 더 자연스럽게 살아납니다. 재즈 피아노 트리오나 어쿠스틱 기타 녹음, 클래식 챔버 음악처럼 공기의 질감이 중요한 장르에서 AKM의 강점이 두드러집니다.
AKM의 플래그십 AK4499EX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회로를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한 2칩 설계를 채택해, 이 따뜻한 질감을 측정 수치와 함께 높은 수준으로 구현해냅니다. Astell&Kern의 SP2000이나 FiiO M15 같은 플래그십 DAP들이 AKM을 선택한 배경에는 이 음악적인 자연스러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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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의 온도를 선택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감각을 먼저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
두 칩셋이 실제로 만들어낸 제품들
FiiO K9 Pro는 두 칩셋의 차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원래 AKM AK4499 탑재 버전으로 출시된 이 제품은 2021년 AKM 공장 화재로 인한 공급 부족 이후 ESS ES9038PRO 듀얼 구성의 K9 Pro ESS 버전으로 재출시됐습니다. 같은 하드웨어 플랫폼, 다른 칩셋 — 그리고 실제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두 버전의 소리 차이가 꽤 명확하게 감지된다는 의견이 지금도 이어집니다. ESS 버전이 해상도와 수치 측면에서 더 나은 스펙을 보여주지만, AKM 버전의 소리를 선호하는 사용자들이 여전히 중고 시장에서 원본 버전을 높은 가격에 찾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Topping D90, Gustard A22 같은 데스크탑 DAC 입문~중급 라인업도 양 진영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제품의 리뷰와 사용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소리의 묘사는 앞서 설명한 칩셋별 성격과 일관되게 맞아떨어집니다.
취향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법
칩셋 스펙보다 실용적인 선택 기준은 자신이 즐겨 듣는 음악 장르와 지금까지 좋아했던 소리의 느낌입니다. 아래 기준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SS가 더 잘 맞는 경우
전자음악, EDM, 팝, 현대 K-pop처럼 디지털 질감과 타이트한 저음이 중요한 장르를 주로 듣는다면 ESS 기반 DAC가 유리합니다. 헤드폰 리뷰에서 "선명하다", "해상도가 높다"는 표현에 매력을 느꼈다면 ESS 쪽입니다. 측정 수치 중심으로 오디오를 접근하는 분들도 ESS의 스펙 친화적인 성향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AKM이 더 잘 맞는 경우
재즈, 클래식, 어쿠스틱, 보컬 중심 음악을 오래 들어도 귀가 피로하지 않길 바란다면 AKM 쪽이 더 편안합니다. "따뜻하다", "아날로그 같다", "음악적이다"라는 표현에서 공감이 된다면 AKM의 성향이 취향과 가깝습니다. 레코드 플레이어의 소리를 좋아하는 분들도 AKM의 음색에서 비슷한 만족감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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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음원, 같은 헤드폰. 그런데 소리가 다르다. 그 차이의 시작은 이 작은 칩 하나에 있다. |
칩셋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
한 가지 분명히 짚어둘 점이 있습니다. 칩셋은 소리의 성격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입니다. 같은 ESS 칩을 사용해도 아날로그 출력 단의 설계, 전원부 품질, 클록 정확도에 따라 최종 소리는 크게 달라집니다. 저가 제품에서 고가 ESS 칩을 쓴다고 고가 AKM 제품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칩셋은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이지, 최종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용하는 시스템에서 소리가 약간 피곤하거나 반대로 밋밋하게 느껴진다면 — 그 감각이 이미 칩셋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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